[중앙일보] “손가락 부러진 게 비극은 아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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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_concour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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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8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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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바이올린 콩쿠르 우승한 실력파 … “여든까지 연주할 거예요”
바이올린 연주자 강주미(24). 해외에선 ‘클라라 주미 강’으로 알려져 있다. 독일에서 자라 다섯 살 때 독일 잡지 ‘디차이트’에 표지모델로 실렸다. ‘신동’으로 소개됐다. 열두 살이던1999년 9월 왼손 새끼손가락을 다쳤다. 병원에선 “바이올린을 다시 하지 못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녀는 열넷에 다시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2004년 귀국해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했다. 동기들보다 두 살 어린 나이였다.
2009년 서울국제음악콩쿠르, 2010년 센다이 국제콩쿠르, 그리고 같은 해 세계 3대 바이올린 콩쿠르 중 하나인 미국 인디애나 콩쿠르에서 강주미는 잇따라 우승했다. 연주자로서 다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그런데 “연주자로서 이제 막 시작이고, 여든 살까지 연주할 것”이라고 한다.
지난 5일 오전 강주미를 만났다. 그녀는 당일 저녁 연주를 앞두고 있었다. 재외동포재단 주최의 ‘2011 코리안 페스티벌’ 무대였다. 그녀에게 긴장감은 보이지 않았다. 스물넷다운 패기만이 넘쳤다.
●연주자로서 인정받은 것인가요.
“콩쿠르에서 우승하면 모든 사람이 ‘쟤는 성공했다’고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오히려 고생길의 시작이에요. 연주자로서 이제 바닥부터 시작하는 거잖아요.”
●연주만 열심히 한 줄 알았는데, 아르바이트도 많이 해봤다면서요.
“세션 연주(가수 반주 녹음)도 하고, 결혼식 반주도 하고요. 대학 등록금도 내고 생활비도 벌어야 하니까요. 음악 공부를 셋씩이나 했다고 하면 ‘정말 돈 많이 들었겠다’고 하시는데, 우리 집안은 정말 돈 안 들이고 음악을 한 것 같아요. 언니가 반주를 다 해줬기 때문에 오빠랑 저는 반주비도 전혀 안 들었어요.”
주미씨의 부친은 강병운(63) 서울대 성악과 교수, 모친은 쾰른음대 출신의 한민희(58)씨다. 주미씨에 따르면 모친은 “독일에서 스물넷에 오페라 주역을 했다”고 한다. “아시아 최초”였고, 주미씨가 세 살 때 성악을 그만뒀다 한다. “저희 남매들 뒷바라지하시느라 그만두신 거죠. 유럽 지휘자들을 만나면 지금도 우리 엄마 얘기를 많이 하세요.” 주미씨 언니 강유미(31)씨는 피아니스트, 오빠 강주호(26)씨는 첼리스트다.
그녀는 도로시 딜레이, 자카르 브론, 김남윤 등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서 배웠다. 그런데 돈이 안 들었다니.
“저희가 독일에서 미국으로 잠깐 이사한 것도 미국에 있는 딜레이 선생님이 ‘저랑 언니·오빠까지 전액 장학금을 주겠다’ 하셔서 간 거예요. 이런 식으로 저 때문에 저희 가족이 이사를 많이 다녔어요. 형제들에게 되게 미안한 부분이죠. 베를린국제학교도 진짜 비싼 학교인데, 다니엘 바렌보임이 추천서를 써줘서 오빠랑 같이 장학금을 받고 다녔죠. 한국예술종합학교에는 김남윤 선생님이 불러주셨죠.”
바렌보임은 세계적 지휘자다. “브람스의 곡을 여덟 살 때 다 끝냈고, 베토벤의 곡도 아홉살 때 다 끝냈다”는 주미씨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봤다. 바렌보임이 이끄는 시카고심포니와 열두 살 주미씨의 협연이 잡혔다. 협연이 한 달도 채 안 남은 1999년 9월 주미씨의 손가락이 부러졌다. 현을 짚는 왼손 새끼손가락이.
“제가 키가 커서 가능성이 있어 보였나 봐요. 학교 체육선생님이 ‘여자 농구팀을 만들려고 하니 들어오라’고 해서 수업 끝나고 매일 한 시간씩 농구를 했죠. 아버지 몰래 말이에요. 그러다가 그만…. 의사 선생님이 ‘바이올린을 아예 못 할 것’이라고 진단했다니까요.”
●많이 힘들었겠어요.
“바이올린을 다시 할 수 있을 것 같은 상황이었다면 힘들었겠죠. 그런데 ‘아예 바이올린을 못 한다’고 하니 별로 힘들지 않았어요. 바이올린을 제 인생에서 빨리 지워버려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바이올린을 쉽게 지웠나요.
“아니었죠. 그래서 그걸 제가 노래로 풀었어요. 복음성가(CCM) 작곡도 열심히 했고요. 결국 음악을 할 거라는 생각은 했으니까요. 우리가 음악가 집안이고, 제 재능은 음악밖에 없었어요.”
기적이란 게 있나 보다. 아니 인생은 기적의 연속인지 모른다. 열네 살에 강주미는 ‘복귀’의 가능성을 느꼈다. 2003년 6월 한국에 와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입시를 치렀다. 대부분의 동기보다 2년 이른 나이에 입학했다.
“손가락이 부러진 덕에 세상을 많이 알았어요. 그래서 저는 비극이었다고 생각 안 해요. 만약 손가락 안 다치고 바렌보임이랑 협연했다면 굉장히 건방진 아이가 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손가락이 부러져 2년 넘게 악기를 내려놓고도 “비극이 아니었다”고 강주미는 말한다. 당당히 재기에 성공한 청춘의 자신감일까. 그녀의 속마음을 알기까진 좀 더 시간이 걸렸다.
●손가락 다친 경험에 대해 너무 초연하네요.
“바렌보임 협연을 놓친 게 좀 아쉽긴 하죠. 이름을 크게 알릴 수 있는 계기였으니까요. 그래도 세상이 참 좋은 것이, 이제는 신동보다는 성숙한 연주자를 더 좋아하잖아요. ‘신동이 오래 안 간다’는 것도 세상이 알고요. 요즘엔 연주자들이 20대, 30대에 뜨잖아요. 평생 연주자를 해야 하는데, 10대에 ‘반짝’ 하면 뭐해요. 앞으로 60년, 70년을 더 해야 하는데요.”
●주미씨는 무대에서 긴장을 안 할 것 같네요.
“그렇지는 않아요. 어린 꿈나무들이 저한테 와서 ‘언니가 제 우상이에요’ 이런 얘기를 할 때 너무 부담이 돼요. 이 꿈나무들이 내 연주를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제게서 뭔가 배울 점을 찾을 텐데 ‘내가 혹시 채워주지 못하는 날이 오면 어떻게 하지’ 이런 걱정을 해요.”
●어릴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죠. 어떤 사람이 신동이라고 생각해요.
“제 생각에, 신동이라고 하면 다른 아이들과는 머릿속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아이 아닐까요. ‘저 아이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어떻게 저 나이에 저런 음악을 하지?’ 이렇게 느껴지는 아이가 신동이죠. 기교적으로 뛰어난 아이가 신동은 아니라고 봐요.”
그러면서도 강주미는 스스로 ‘내가 신동은 아니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기교가 뛰어난 아이가 아니면 도대체 신동이 뭐란 말인가. 사전을 펼쳐보니 ‘신동(神童)’은 ‘여러 가지 재주와 지혜가 남달리 뛰어난 아이’다.
●독어 이름이 ‘클라라’죠.
“저희가 2남2녀인데, 다 독일 이름이 있어요. 저는 ‘클라라 슈만’(독일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에서 클라라를, 언니는 ‘안나 막델레나’에서 안나(바흐의 아내)를, 오빠는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에서 보리스를 따서 부모님이 지으신 이름이에요. 다 음악과 관련 있는 이름들이죠. 그래서 저희 셋은 다 음악을 하고 있죠. 막내는 데이비드인데, ‘다윗과 골리앗’의 다윗이죠. 그래서인지 막내만 음악을 안 하고 있어요. 하하하.”
●동생은 뭐 하나요.
“호텔 경영을 공부해요. 엄마가 처음에 ‘그것, 돈 많이 드는 공부다’ 했더니 우리 동생이 ‘누나들이랑 형은 음악 공부 시켰잖아요’ 하고 따지더래요. 그래서 엄마가 ‘걔들은 돈 안 들이고 음악 시켰다’ 했대요. 동생도 그걸 잊고 있었던 거예요. 하하.”
●연습을 오래하기보다 집중해서 하는 편이라면서요.
“아버지, 어머니가 그렇게 훈련을 시키셨어요. 악기 잡고서 세 시간 이상은 안 했어요. 학교 가기 전 두 시간, 점심 먹고 두 시간, 저녁 먹고 두 시간 이런 식으로 했죠. 건강을 중요시하셔서 낮잠은 꼭 자야 했고요. 지금도 저는 두 시간 연습하면 머리가 아파요. 너무 집중하니까.”
●부모님이 훌륭하셨군요.
“그런데 말이에요. 그게 우리 부모님이 성악을 하셔서 그래요. 성악은 그렇게 오래 연습을 못 하잖아요. 왜냐하면 목이 아프니까. 그래서 제가 ‘엄마, 나 팔 아파’ 하면 통하는 거예요. 부모님이 만약 음악을 안 하셨으면 더 지독히 시켰을지도 몰라요. 공부는 앉아서 10시간도 할 수 있잖아요. 이렇게 비교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는 거죠.”
강주미에게는 ‘지혜’가 있는 것 같다. 스물넷의 나이에 걸맞지 않은 지혜가. 문득 그녀의 20년 뒤, 40년 뒤가 궁금해졌다.
●20년 뒤에는 뭐 하고 있을 것 같아요.
“좀 엉뚱하지만, 애를 둘 낳아서 테니스를 시키고 싶어요. 저희 학교 테니스코치가 저더러 ‘테니스 잘할 체형’이라고 했거든요. 아이들이 저랑 체형이 비슷하다면 테니스를 시켜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개인적으로는 일단 제가 서고 싶은 무대는 다 서 보고 싶어요. 그리고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으면 좋겠어요. 제 이름의 재단도 있고, 암에 걸린 아이들을 위해 기부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럼 40년 뒤에 강주미는 뭐 하고 있을까요.
“바이올린 연주는 안 멈출 거예요. 여든까지 연주할 거예요. 지휘자들은 죽는 순간까지 지휘하잖아요. 바이올린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강주미의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이 들어 있는 듯하다.
“어릴 때부터 저를 이끄시는 분이 계신다는 생각을 했어요. 손가락을 다치고, 그럼에도 또 계속 음악을 하게 하신 이유가 있다고 봐요. 음악을 통해 제게 맡기신 역할이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힘들 때 음악을 찾잖아요. 전 세계가 알아들을 수 있는 유일한 언어이고요. 이번에 센다이 다녀와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고요.”
강주미는 지난해 센다이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우승자로서 올해 5월 말 센다이와 후쿠시마에서 연주하게 돼 있었다. 그런데 연주를 두 달 앞두고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다. 강주미가 서야 할 공연장도 피해를 봤다.
“쓰나미(지진해일) 때문에 학교들이 무너지고, 어린이가 많이 죽었다고 들었어요. 8월 말 일본에서 연주가 있었어요. 그참에 이틀 동안 센다이를 다녀왔어요. 중학교랑 고등학교를 방문해 연주했어요. ‘지금 이 시점에 와주는 게 고맙다’고들 하더라고요. ‘이런 게 행복이구나’ 싶었어요.”
‘손가락이 부러진 게 비극이 아니었다’는 말, ‘다시 음악을 하게 된 이유가 있다’는 말이 와닿았다.
강주미는 다음 달 자신의 첫 솔로 앨범을 낸다고 한다. “이때까지 보기 힘들었던 앨범일 것”이라고 하니 기대가 된다.
What Matters Most?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행복 아닐까요. 어찌 됐든 사람이 행복해야 하니까요. 가정도 행복해야 하고. 힘든 일이 있어도 행복하게 힘들어 해야 하고요. 저한테는 의무감 같은 게 있어요. 보통 사람들보다 더 행복한 걸 많이 느껴야 할 것 같아요. 제가 아플 땐 보통 사람들보다 더 아프고, 힘들 때 보통 사람들보다 더 힘들어야 할 것 같고요. 그래야 제 마음이 관중에게 전달될 수 있을 테니까요.
j 칵테일 >> 셀린 디옹 프로듀서가 반한 노래 솜씨 … 미국 가서 가수 될 뻔
“재수 없게 들릴지 모르지만 왜 나한테 이렇게 많은 ‘끼’를 주셨을까, 원망스러운 적이 있어요.”
강주미는 성악가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노래에도 재능이 있었나 보다. 손가락을 다쳐 바이올린을 할 수 없었던 시절, 그리고 대학(한국예술종합학교) 입학 초에도 복음성가를 열심히 불렀다. 스스로 작곡하고 노래를 불러 ‘데모 시디’도 만들었다. 그래서 그녀의 노래가 지금까지도 이따금 극동방송(기독교 방송)을 통해 방송을 타기도 한다.
그녀의 데모 시디는 6년 전쯤 세계적 가수 셀린 디옹의 프로듀서 손에 들어갔다. 아시아 출신의 세계적 스타를 발굴하기 위해 방한했던 프로듀서에게 한국의 음악 관계자가 시디를 건네줬던 것이다. 부친의 제자 중 한 명이었다. 유창한 영어와 독어로 부른 노래가 포함돼 있으니 세계적 스타 가수의 가능성이 있었나 보다. “살 좀 빼고 코만 조금 높이면 될 것 같다. 당장 미국에 데려가겠다”는 말이 프로듀서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아빠가 ‘너, 미국 가서 아예 가수 해라’ 하시더라고요. 그날로 제가 노래를 버렸어요. ‘가수 안 한 걸 후회하지 않으려면 바이올린을 진짜 열심히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전 역시 클래식이 좋아요.”
글=성시윤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중앙일보 2011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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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 연주자 강주미(24). 해외에선 ‘클라라 주미 강’으로 알려져 있다. 독일에서 자라 다섯 살 때 독일 잡지 ‘디차이트’에 표지모델로 실렸다. ‘신동’으로 소개됐다. 열두 살이던1999년 9월 왼손 새끼손가락을 다쳤다. 병원에선 “바이올린을 다시 하지 못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녀는 열넷에 다시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2004년 귀국해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했다. 동기들보다 두 살 어린 나이였다.
2009년 서울국제음악콩쿠르, 2010년 센다이 국제콩쿠르, 그리고 같은 해 세계 3대 바이올린 콩쿠르 중 하나인 미국 인디애나 콩쿠르에서 강주미는 잇따라 우승했다. 연주자로서 다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그런데 “연주자로서 이제 막 시작이고, 여든 살까지 연주할 것”이라고 한다.
지난 5일 오전 강주미를 만났다. 그녀는 당일 저녁 연주를 앞두고 있었다. 재외동포재단 주최의 ‘2011 코리안 페스티벌’ 무대였다. 그녀에게 긴장감은 보이지 않았다. 스물넷다운 패기만이 넘쳤다.
●연주자로서 인정받은 것인가요.
“콩쿠르에서 우승하면 모든 사람이 ‘쟤는 성공했다’고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오히려 고생길의 시작이에요. 연주자로서 이제 바닥부터 시작하는 거잖아요.”
●연주만 열심히 한 줄 알았는데, 아르바이트도 많이 해봤다면서요.
“세션 연주(가수 반주 녹음)도 하고, 결혼식 반주도 하고요. 대학 등록금도 내고 생활비도 벌어야 하니까요. 음악 공부를 셋씩이나 했다고 하면 ‘정말 돈 많이 들었겠다’고 하시는데, 우리 집안은 정말 돈 안 들이고 음악을 한 것 같아요. 언니가 반주를 다 해줬기 때문에 오빠랑 저는 반주비도 전혀 안 들었어요.”
주미씨의 부친은 강병운(63) 서울대 성악과 교수, 모친은 쾰른음대 출신의 한민희(58)씨다. 주미씨에 따르면 모친은 “독일에서 스물넷에 오페라 주역을 했다”고 한다. “아시아 최초”였고, 주미씨가 세 살 때 성악을 그만뒀다 한다. “저희 남매들 뒷바라지하시느라 그만두신 거죠. 유럽 지휘자들을 만나면 지금도 우리 엄마 얘기를 많이 하세요.” 주미씨 언니 강유미(31)씨는 피아니스트, 오빠 강주호(26)씨는 첼리스트다.
그녀는 도로시 딜레이, 자카르 브론, 김남윤 등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서 배웠다. 그런데 돈이 안 들었다니.
“저희가 독일에서 미국으로 잠깐 이사한 것도 미국에 있는 딜레이 선생님이 ‘저랑 언니·오빠까지 전액 장학금을 주겠다’ 하셔서 간 거예요. 이런 식으로 저 때문에 저희 가족이 이사를 많이 다녔어요. 형제들에게 되게 미안한 부분이죠. 베를린국제학교도 진짜 비싼 학교인데, 다니엘 바렌보임이 추천서를 써줘서 오빠랑 같이 장학금을 받고 다녔죠. 한국예술종합학교에는 김남윤 선생님이 불러주셨죠.”
바렌보임은 세계적 지휘자다. “브람스의 곡을 여덟 살 때 다 끝냈고, 베토벤의 곡도 아홉살 때 다 끝냈다”는 주미씨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봤다. 바렌보임이 이끄는 시카고심포니와 열두 살 주미씨의 협연이 잡혔다. 협연이 한 달도 채 안 남은 1999년 9월 주미씨의 손가락이 부러졌다. 현을 짚는 왼손 새끼손가락이.
“제가 키가 커서 가능성이 있어 보였나 봐요. 학교 체육선생님이 ‘여자 농구팀을 만들려고 하니 들어오라’고 해서 수업 끝나고 매일 한 시간씩 농구를 했죠. 아버지 몰래 말이에요. 그러다가 그만…. 의사 선생님이 ‘바이올린을 아예 못 할 것’이라고 진단했다니까요.”
●많이 힘들었겠어요.
“바이올린을 다시 할 수 있을 것 같은 상황이었다면 힘들었겠죠. 그런데 ‘아예 바이올린을 못 한다’고 하니 별로 힘들지 않았어요. 바이올린을 제 인생에서 빨리 지워버려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바이올린을 쉽게 지웠나요.
“아니었죠. 그래서 그걸 제가 노래로 풀었어요. 복음성가(CCM) 작곡도 열심히 했고요. 결국 음악을 할 거라는 생각은 했으니까요. 우리가 음악가 집안이고, 제 재능은 음악밖에 없었어요.”
기적이란 게 있나 보다. 아니 인생은 기적의 연속인지 모른다. 열네 살에 강주미는 ‘복귀’의 가능성을 느꼈다. 2003년 6월 한국에 와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입시를 치렀다. 대부분의 동기보다 2년 이른 나이에 입학했다.
“손가락이 부러진 덕에 세상을 많이 알았어요. 그래서 저는 비극이었다고 생각 안 해요. 만약 손가락 안 다치고 바렌보임이랑 협연했다면 굉장히 건방진 아이가 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손가락이 부러져 2년 넘게 악기를 내려놓고도 “비극이 아니었다”고 강주미는 말한다. 당당히 재기에 성공한 청춘의 자신감일까. 그녀의 속마음을 알기까진 좀 더 시간이 걸렸다.
●손가락 다친 경험에 대해 너무 초연하네요.
“바렌보임 협연을 놓친 게 좀 아쉽긴 하죠. 이름을 크게 알릴 수 있는 계기였으니까요. 그래도 세상이 참 좋은 것이, 이제는 신동보다는 성숙한 연주자를 더 좋아하잖아요. ‘신동이 오래 안 간다’는 것도 세상이 알고요. 요즘엔 연주자들이 20대, 30대에 뜨잖아요. 평생 연주자를 해야 하는데, 10대에 ‘반짝’ 하면 뭐해요. 앞으로 60년, 70년을 더 해야 하는데요.”
●주미씨는 무대에서 긴장을 안 할 것 같네요.
“그렇지는 않아요. 어린 꿈나무들이 저한테 와서 ‘언니가 제 우상이에요’ 이런 얘기를 할 때 너무 부담이 돼요. 이 꿈나무들이 내 연주를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제게서 뭔가 배울 점을 찾을 텐데 ‘내가 혹시 채워주지 못하는 날이 오면 어떻게 하지’ 이런 걱정을 해요.”
●어릴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죠. 어떤 사람이 신동이라고 생각해요.
“제 생각에, 신동이라고 하면 다른 아이들과는 머릿속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아이 아닐까요. ‘저 아이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어떻게 저 나이에 저런 음악을 하지?’ 이렇게 느껴지는 아이가 신동이죠. 기교적으로 뛰어난 아이가 신동은 아니라고 봐요.”
그러면서도 강주미는 스스로 ‘내가 신동은 아니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기교가 뛰어난 아이가 아니면 도대체 신동이 뭐란 말인가. 사전을 펼쳐보니 ‘신동(神童)’은 ‘여러 가지 재주와 지혜가 남달리 뛰어난 아이’다.
●독어 이름이 ‘클라라’죠.
“저희가 2남2녀인데, 다 독일 이름이 있어요. 저는 ‘클라라 슈만’(독일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에서 클라라를, 언니는 ‘안나 막델레나’에서 안나(바흐의 아내)를, 오빠는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에서 보리스를 따서 부모님이 지으신 이름이에요. 다 음악과 관련 있는 이름들이죠. 그래서 저희 셋은 다 음악을 하고 있죠. 막내는 데이비드인데, ‘다윗과 골리앗’의 다윗이죠. 그래서인지 막내만 음악을 안 하고 있어요. 하하하.”
●동생은 뭐 하나요.
“호텔 경영을 공부해요. 엄마가 처음에 ‘그것, 돈 많이 드는 공부다’ 했더니 우리 동생이 ‘누나들이랑 형은 음악 공부 시켰잖아요’ 하고 따지더래요. 그래서 엄마가 ‘걔들은 돈 안 들이고 음악 시켰다’ 했대요. 동생도 그걸 잊고 있었던 거예요. 하하.”
●연습을 오래하기보다 집중해서 하는 편이라면서요.
“아버지, 어머니가 그렇게 훈련을 시키셨어요. 악기 잡고서 세 시간 이상은 안 했어요. 학교 가기 전 두 시간, 점심 먹고 두 시간, 저녁 먹고 두 시간 이런 식으로 했죠. 건강을 중요시하셔서 낮잠은 꼭 자야 했고요. 지금도 저는 두 시간 연습하면 머리가 아파요. 너무 집중하니까.”
●부모님이 훌륭하셨군요.
“그런데 말이에요. 그게 우리 부모님이 성악을 하셔서 그래요. 성악은 그렇게 오래 연습을 못 하잖아요. 왜냐하면 목이 아프니까. 그래서 제가 ‘엄마, 나 팔 아파’ 하면 통하는 거예요. 부모님이 만약 음악을 안 하셨으면 더 지독히 시켰을지도 몰라요. 공부는 앉아서 10시간도 할 수 있잖아요. 이렇게 비교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는 거죠.”
강주미에게는 ‘지혜’가 있는 것 같다. 스물넷의 나이에 걸맞지 않은 지혜가. 문득 그녀의 20년 뒤, 40년 뒤가 궁금해졌다.
●20년 뒤에는 뭐 하고 있을 것 같아요.
“좀 엉뚱하지만, 애를 둘 낳아서 테니스를 시키고 싶어요. 저희 학교 테니스코치가 저더러 ‘테니스 잘할 체형’이라고 했거든요. 아이들이 저랑 체형이 비슷하다면 테니스를 시켜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개인적으로는 일단 제가 서고 싶은 무대는 다 서 보고 싶어요. 그리고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으면 좋겠어요. 제 이름의 재단도 있고, 암에 걸린 아이들을 위해 기부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럼 40년 뒤에 강주미는 뭐 하고 있을까요.
“바이올린 연주는 안 멈출 거예요. 여든까지 연주할 거예요. 지휘자들은 죽는 순간까지 지휘하잖아요. 바이올린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강주미의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이 들어 있는 듯하다.
“어릴 때부터 저를 이끄시는 분이 계신다는 생각을 했어요. 손가락을 다치고, 그럼에도 또 계속 음악을 하게 하신 이유가 있다고 봐요. 음악을 통해 제게 맡기신 역할이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힘들 때 음악을 찾잖아요. 전 세계가 알아들을 수 있는 유일한 언어이고요. 이번에 센다이 다녀와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고요.”
강주미는 지난해 센다이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우승자로서 올해 5월 말 센다이와 후쿠시마에서 연주하게 돼 있었다. 그런데 연주를 두 달 앞두고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다. 강주미가 서야 할 공연장도 피해를 봤다.
“쓰나미(지진해일) 때문에 학교들이 무너지고, 어린이가 많이 죽었다고 들었어요. 8월 말 일본에서 연주가 있었어요. 그참에 이틀 동안 센다이를 다녀왔어요. 중학교랑 고등학교를 방문해 연주했어요. ‘지금 이 시점에 와주는 게 고맙다’고들 하더라고요. ‘이런 게 행복이구나’ 싶었어요.”
‘손가락이 부러진 게 비극이 아니었다’는 말, ‘다시 음악을 하게 된 이유가 있다’는 말이 와닿았다.
강주미는 다음 달 자신의 첫 솔로 앨범을 낸다고 한다. “이때까지 보기 힘들었던 앨범일 것”이라고 하니 기대가 된다.
What Matters Most?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행복 아닐까요. 어찌 됐든 사람이 행복해야 하니까요. 가정도 행복해야 하고. 힘든 일이 있어도 행복하게 힘들어 해야 하고요. 저한테는 의무감 같은 게 있어요. 보통 사람들보다 더 행복한 걸 많이 느껴야 할 것 같아요. 제가 아플 땐 보통 사람들보다 더 아프고, 힘들 때 보통 사람들보다 더 힘들어야 할 것 같고요. 그래야 제 마음이 관중에게 전달될 수 있을 테니까요.
j 칵테일 >> 셀린 디옹 프로듀서가 반한 노래 솜씨 … 미국 가서 가수 될 뻔
“재수 없게 들릴지 모르지만 왜 나한테 이렇게 많은 ‘끼’를 주셨을까, 원망스러운 적이 있어요.”
강주미는 성악가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노래에도 재능이 있었나 보다. 손가락을 다쳐 바이올린을 할 수 없었던 시절, 그리고 대학(한국예술종합학교) 입학 초에도 복음성가를 열심히 불렀다. 스스로 작곡하고 노래를 불러 ‘데모 시디’도 만들었다. 그래서 그녀의 노래가 지금까지도 이따금 극동방송(기독교 방송)을 통해 방송을 타기도 한다.
그녀의 데모 시디는 6년 전쯤 세계적 가수 셀린 디옹의 프로듀서 손에 들어갔다. 아시아 출신의 세계적 스타를 발굴하기 위해 방한했던 프로듀서에게 한국의 음악 관계자가 시디를 건네줬던 것이다. 부친의 제자 중 한 명이었다. 유창한 영어와 독어로 부른 노래가 포함돼 있으니 세계적 스타 가수의 가능성이 있었나 보다. “살 좀 빼고 코만 조금 높이면 될 것 같다. 당장 미국에 데려가겠다”는 말이 프로듀서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아빠가 ‘너, 미국 가서 아예 가수 해라’ 하시더라고요. 그날로 제가 노래를 버렸어요. ‘가수 안 한 걸 후회하지 않으려면 바이올린을 진짜 열심히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전 역시 클래식이 좋아요.”
글=성시윤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중앙일보 2011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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