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남

비운의 천재 작곡가 김순남(1917~1983?)은 한국 현대 음악의 초석을 다진 음악가다. 일제 강점기라는 척박한 환경에서 한국 최초로 현대창작 기법으로 작곡계를 주도했으며, 서구 현대 음악을 민족적 정서와 결합해 독창적인 민족음악으로 발전시켰다. 김순남의 작품을 접한 당대 러시아의 거장들은 “동양에도 이런 천재가 있었느냐”(쇼스타코비치) “내가 배울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하차투리안)이라는 찬사를 보냈지만, 정작 고국에서는 냉전 이데올로기에 희생돼 김순남은 오랜 세월 작품이 금지됐다. 서울에서 태어난 김순남은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 일본으로 유학, 동경고등음악학원을 거쳐 동경제국음악학교 작곡과를 졸업했다. 1944년 12월 17일 <제1회 김순남 작곡발표회>를 열었는데 이는 한국 양악사에 있어 첫 현대작곡발표회였다. 1947년 발간한 가곡집 <산유화>는 한국 가곡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표제곡 <산유화>는 한국 전통 음계인 5음 음계와 서구의 전위적인 화성을 결합시킨 현대 가곡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는다. 1948년 딸을 위해 쓴 자장가가 포함된 두번째 가곡집 <자장가>를 출간했다. 이 무렵 김순남은 한국 최초의 피아노협주곡을 남겼다. <피아노협주곡 D장조>로 그의 재능을 아꼈던 미군정 문화 참사관 엘라이 헤이모위츠에게 헌정된 작품이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한반도에서 좌우 이념 대립이 가장 극심했던 때였다. 그는 민족국가 건설의지를 담은 <자유의 노래> <건국행진곡> <인민항쟁가> 등을 작곡했는데 <인민항쟁가>는 민중 투쟁의 상징곡이자 사실상 좌익 진영의 국가처럼 널리 불렸다.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하나의 무기”(평론가박용구)라는 평을 받은 이 곡은 김순남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좌익음악가로 몰려 체포령이 내려지자 아내와 세살배기 딸을 남겨두고 1948년 7월 월북했다. 이후 남쪽에서는 김순남의 음악은 금지됐고 그의 이름은 지워졌다. 북으로 간 김순남은 1952년 소련연방작곡가동맹의 추천으로 러시아 차이콥스키 음악원 이론작곡학부에 입학했는데 당시 작곡 담당 교수는 하차투리안이었다. 하차투리안은 김순남의 <빨치산의 노래>를 편곡해 자신의 가곡집에 싣고 <조선파르티잔의 노래>로 발표했다. 1953년 모스크바 유학 도중 김순남은 북한으로 소환당한다. 그는 ‘부르주아 음악가’라는 비판과 함께숙청돼 ‘창작 권리’를 박탈당하고 그의 음악은 북한에서도 금지됐다. 공장 노동자로 전락한 그는 폐병으로 1983년경 생을 마감했다. 남한에서는 좌파 음악가로 매도되고, 북한에서 부르주아 음악가로 숙청돼 양쪽 모두로부터 버림받았던 김순남. 1988년 해금 조치 이후 김순남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됐고 2017년에는 탄생 100주년을 맞아 국립극장에서 그의 작품이 공연됐다. 현재 김순남은 한국 근현대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