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당찬 스타 탄생 예감!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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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_concours2
작성일
2009-11-28 15:12
조회
251
제5회 서울국제음악콩쿠르에서 우승한 클라라 주미 강을 만났다 예사롭지 않은 끼가 당찬 스타 탄생을 예감케 했다.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
당찬 스타 탄생 예감!
촬영을 위해 클라라 주미 강이 악기를 꺼내자 케이스 안에 꽂힌 사진 두 장이 눈에 띄었다. "무슨 사진이에요?" "하나는 열한 살 때 바렌보임이랑 찍은 거, 다른 하나는 일곱살 때 한국에서 협연하며 찍은 거예요." 셔터 소리에 대화가 끊겼다. 카메라 앞 클라라 주미 강은 '알아서 척척'이었다. 범상치 않은 끼가 풍겨나왔다. 훤칠한 키와 타고난 피부를 보니 모델을 해도 될 듯했다. 유쾌한 촬영을 마치고 커피를 앞에 둔 채 본격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외모만 보면 곱디곱게 자랐을 법한데, 새끼손가락을 다쳐서 수술을 두 번 받았고, 다시는 악기를 할 수 없다는 진단에 한동안 연주를 쉬었다는 우여곡절 많은 지난 날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바렌보임의 집에 살았던 연유가 궁금하네요.
열 살 때, 아버지(베이스 강병운)께서 '바이올린을 계속할 거면 아빠랑 독일에 가자'라고 하셨어요. 당시 저는 외국에서 연주하다 집안 사정으로 한국에 있었거든요. 주저없이 아버지를 따라 베를린에 갔죠. 그리고 어느 날 아버지께서 함께 자주 연주하던 바렌보임에게 제 연주를 들어봐달라고 부탁했어요. 바렌보임은 제 연주를 듣고 너무나 좋아하며 저를 키우겠다고 했고요. 이후 바렌보임이 제가 베를린에 마땅한 집도 없는데다 아버지께서 연주 때문에 전 세계를 돌아다녀야 한다는 걸 알고는 선뜻 자신의 집에 머물라고 했어요. 사모님도 무척 좋아하셨죠. 그렇게 해서 1년 정도 그 집에서 지냈어요.
그럼 그 집에 있을 때 손가락을 다친 건가요?
아뇨. 그 집에 머물다가 바렌보임/시카고 심포니와의 협연이 잡히고,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제가 쓰고 싶은 만큼 쓸 수 있다는 계약이 이뤄졌어요. 계약 이후 집을 구해서 두 살 위인 오빠(첼로 전공)와 둘이 살게 됐죠. 처음으로 부모님 눈에 안 보이는 곳에 살게 됐으니 얼마나 신이 났겠어요. 그때가 9월이어서 새 학기라 학교에 갔는데 교내 여자 농구팀을 모집한다는 게시물이 있는 거예요. 제가 그때 한국으로 치면 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 키가 165센티미터였거든요. 그쪽 애들 사이에서도 제가 큰 편이었죠. 신나게 농구를 하다가 덩치가 제 두 배쯤 되는 러시아 여자애가 미는 바람에 날아가다시피 넘어지며 손가락을 다쳤어요. 바렌보임과의 연주회가 10월 4일 경이었는데, 딱 한달 전에 손가락이 그렇게 된 거예요.
너무 안타깝네요!
그때 협연했으면 아마 인생 폈겠죠(하하).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잘된 일인 것 같아요. 음악가가 되기 전에 인간이 되는 게 먼저잖아요. 만약 11세 나이에 그렇게 떠버렸다면 다양한 인생 경험도 못했을 것이고, 인간으로서 많이 성장할 수가 없었겠죠. 17세에 한국에 올 때까지 독일에서 오빠와 둘이 살면서 참 많이 울었지만, 그래도 그 시간이 성숙해지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럼 계약은 물거품이 된 건가요?
손을 오므리지도 못하는데 어쩌겠어요. 당시 쓰던 악기도 대여였어서 손가락을 다치고는 돌려줘야 했죠. 그래도 음악 없이는 삶의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작곡이나 음악치료 같은 걸 할까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어요. 그러다 취미로라도 악기를 해야겠어서 아버지께 아무 악기나 좋으니 사달라고 졸랐죠. 그랬더니 아버지는 어지간한 활 값보다도 싼 악기를 사오셨어요. 그게 이 악기죠(서울국제음악콩쿠르에서도 이 악기를 사용했다-편집자 주). 처음에 이 악기에서는 꽥꽥 거리는 소리가 났는데, 당시에는 악기 소리가 나쁜 줄 몰랐어요. 저도 3년을 쉬어서 아무 연주도 안 됐었으니까요. 그래서 이 악기에 제 손이 길들여지고, 제 손에 이 악기가 길들여지게 됐어요. 다른 사람들은 이 악기로 소리를 잘 못 내요. 저만이 낼 수 있죠.
독일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6년 전 한국행을 결심한 까닭은 무엇인가요?
저를 잘 알고, 제 실력을 다시 잡아줄 분에게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 김남윤 선생님이 떠올랐죠. 선생님께서 초등학교 4학년 때 6개월 정도 봐주신 적이 있어요. 제가 손가락이 부러졌을 때, 악기를 안 하면 안되는 앤데 어쩜 운이 그렇게 안 따라주냐며 전화까지 주신 분이세요.
자, 이제 콩쿠르 얘기 좀 해볼까요? 제5회 서울국제음악콩쿠르에서 우승한 것 축하합니다.
어릴 때에 많이들 콩쿠르에 나가는데, 저는 계속 연주만 해온 케이스예요. 2005년 퀸엘리자베스 콩쿠르가 처음 나간 콩쿠르였죠. 너무 웃기죠. 남들은 다 마지막에 밟는 자리인데 가장 먼저 나갔으니까요. 제가 그 콩쿠르에 나가는 것이 아버지의 소원이었거든요. 우승할 확률은 없더라도 한 달의 콩쿠르 기간 동안 가슴에 와 닿는 큰 경험을 하게 될 것이란게 아버지의 뜻이었죠. 운 좋게 2차까지 됐는데 떨어졌고, 이후 욕심을 낮췄어요. 늘 떨어지거나 3등 하거나 했는데, 처음으로 1등을 했더니 일주일 동안 실감이 나지 않더라고요.
본선에서 베토벤 협주곡 D장조를 연주했잖아요. 가장 자신 있는 곡이었나요?
콩쿠르가 아니면 제가 언제 또 곡을 마음대로 골라서 협연하겠나 싶었어요. 한 곡을 '18번'으로 만들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도 콩쿠르를 나가게 될 텐데 매번 같은 곡을 하면 질릴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본선 무대에 가니 막막했어요. 그런데 다행히 리허설 때부터 잘해야겠다는 부담보다 무대에 서는 기쁨이 더 커졌어요. 무대에 서는 걸 정말 좋아하거든요. 연주를 하다 보면 가끔 저 자신도 모르던 저의 모습을 발견해 소름이 돋는 순간이 있어요. 말도 안되는 핑거링이나 보잉이 될 때가 그렇죠.
스승인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이 심사위원으로 있어서 부담스럽진 않았나요? 콩쿠르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이었는지요.
부담보다는... 선생님께 실망을 안겨드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버뜩 들 때가 있었어요. 제가 다른 제자들에 비해 콩쿠르 성적이 워낙 안 좋았잖아요. 선생님께서는 제게 재능이 있다고 하시며, 노력 앞에서는 재능도 소용없으니 항상 노력하라고 하셨어요.
콩쿠르에서 떨어지면 주위 사람들이 '주미는 실력에 비해 콩쿠르 운이 너무 없다'라는 말을 해주곤 했어요. 예전에는 그 말이 위로가 됐는데, 언젠가부터 그 말이 싫증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결심했죠. 운이 나를 따르지 않는다면, 내가 운을 뛰어넘는다! 그렇게 준비한 이번 콩쿠르는 저 자신과의 싸움이었어요. 7시간 연습하기로 한 날에 6시간 반만 연습하면 제 스스로가 실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어요. 성격이 급한 사람도 아니고, 최고가 되겠다는 마음에 음악을 하는 사람도 아닌데, 저답지 않게 생활 패턴까지 바꾸며 콩쿠르를 준비했어요. 콩쿠르를 준비하면서 정말 많은 걸 배웠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요. 우승이 제게 준 건 '드디어 해냈어!' 가 아니라 '할 수 있어!'인 것 같아요. 자신감을 많이 얻었죠.
콩쿠르에 나가며 겪는 남다른 고충이 있나요?
처음 두 번의 콩쿠르는 아버지께서 비용을 대주셨는데, 그게 다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았죠. 그래서 이후 콩쿠르부터는 제가 아르바이트로 벌어서 콩쿠르 비용을 댔어요. 외국 콩쿠르에 갈 때 비행기 티켓과 숙박료에 악기 대여까지 하려면 얼추 1천만 원이 들어요. 저 스스로의 능력으로 1천만 원 벌려면 녹음을 비롯해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죠. 콩쿠르 치르러 가기 전날까지 아르바이트를 한 날도 있어요. 아, 전 레슨은 안해요. 연주를 얼마나 한다고 누굴 가르치고 있나 싶기도 하고,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것도 힘들어서요. 이번에 콩쿠르는 아르바이트에 대한 부담이 없어서 좋은 결과가 있었는지도 몰라요. 외국에 콩쿠르 나갈 때에는 연습 시간을 줄여가며 돈을 벌었는데, 이번에는 오로지 연습에만 집중했으니까요. 하지만 콩쿠르가 학교 바로 앞에서 치러지니 집중이 쉽지 않고 부담도 커지더라고요.
20대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됐죠. 앞으로의 20대를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하고 싶은게 너무너무 많아요! 작사, 작곡, 작문, 다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사실 노래도 꽤 하고, 춤추는 것도 굉장히 좋아해요. 가수 제안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바이올린만 하기에도 너무 바빠요. 일단 바이올린에만 충실하고 싶어요. 그러면서 여기저기 기회를 엿볼 거예요. 작곡도 하고, 체임버도 만들며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닌 '음악인'이 되고 싶어요.
끝으로 롤 모델이 있으면 이야기해주세요.
음악가는 아닌데... 이를 테면 간디처럼, 무엇인가 포기해야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금전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보다는 음악의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연주하고 싶어요. 가난하게 태어난 게 죄는 아니잖아요. 그들에게 음악이 주는 행복을 알려주고 싶어요. 음악가 중에서는 안네 소피 무터가 롤 모델이에요. 귀가 너무 좋고, 놓치는 음이 없으며, 항상 프로다운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죠. 어디서 들리든 무터의 연주는 딱 알겠어요. 그런 연주자가 되고 싶어요.
글. 김정은 / 사진. 강태욱
월간 객석. 2009. 6월호
SPOTLIGHT(Page 88~89)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
당찬 스타 탄생 예감!
촬영을 위해 클라라 주미 강이 악기를 꺼내자 케이스 안에 꽂힌 사진 두 장이 눈에 띄었다. "무슨 사진이에요?" "하나는 열한 살 때 바렌보임이랑 찍은 거, 다른 하나는 일곱살 때 한국에서 협연하며 찍은 거예요." 셔터 소리에 대화가 끊겼다. 카메라 앞 클라라 주미 강은 '알아서 척척'이었다. 범상치 않은 끼가 풍겨나왔다. 훤칠한 키와 타고난 피부를 보니 모델을 해도 될 듯했다. 유쾌한 촬영을 마치고 커피를 앞에 둔 채 본격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외모만 보면 곱디곱게 자랐을 법한데, 새끼손가락을 다쳐서 수술을 두 번 받았고, 다시는 악기를 할 수 없다는 진단에 한동안 연주를 쉬었다는 우여곡절 많은 지난 날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바렌보임의 집에 살았던 연유가 궁금하네요.
열 살 때, 아버지(베이스 강병운)께서 '바이올린을 계속할 거면 아빠랑 독일에 가자'라고 하셨어요. 당시 저는 외국에서 연주하다 집안 사정으로 한국에 있었거든요. 주저없이 아버지를 따라 베를린에 갔죠. 그리고 어느 날 아버지께서 함께 자주 연주하던 바렌보임에게 제 연주를 들어봐달라고 부탁했어요. 바렌보임은 제 연주를 듣고 너무나 좋아하며 저를 키우겠다고 했고요. 이후 바렌보임이 제가 베를린에 마땅한 집도 없는데다 아버지께서 연주 때문에 전 세계를 돌아다녀야 한다는 걸 알고는 선뜻 자신의 집에 머물라고 했어요. 사모님도 무척 좋아하셨죠. 그렇게 해서 1년 정도 그 집에서 지냈어요.
그럼 그 집에 있을 때 손가락을 다친 건가요?
아뇨. 그 집에 머물다가 바렌보임/시카고 심포니와의 협연이 잡히고,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제가 쓰고 싶은 만큼 쓸 수 있다는 계약이 이뤄졌어요. 계약 이후 집을 구해서 두 살 위인 오빠(첼로 전공)와 둘이 살게 됐죠. 처음으로 부모님 눈에 안 보이는 곳에 살게 됐으니 얼마나 신이 났겠어요. 그때가 9월이어서 새 학기라 학교에 갔는데 교내 여자 농구팀을 모집한다는 게시물이 있는 거예요. 제가 그때 한국으로 치면 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 키가 165센티미터였거든요. 그쪽 애들 사이에서도 제가 큰 편이었죠. 신나게 농구를 하다가 덩치가 제 두 배쯤 되는 러시아 여자애가 미는 바람에 날아가다시피 넘어지며 손가락을 다쳤어요. 바렌보임과의 연주회가 10월 4일 경이었는데, 딱 한달 전에 손가락이 그렇게 된 거예요.
너무 안타깝네요!
그때 협연했으면 아마 인생 폈겠죠(하하).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잘된 일인 것 같아요. 음악가가 되기 전에 인간이 되는 게 먼저잖아요. 만약 11세 나이에 그렇게 떠버렸다면 다양한 인생 경험도 못했을 것이고, 인간으로서 많이 성장할 수가 없었겠죠. 17세에 한국에 올 때까지 독일에서 오빠와 둘이 살면서 참 많이 울었지만, 그래도 그 시간이 성숙해지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럼 계약은 물거품이 된 건가요?
손을 오므리지도 못하는데 어쩌겠어요. 당시 쓰던 악기도 대여였어서 손가락을 다치고는 돌려줘야 했죠. 그래도 음악 없이는 삶의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작곡이나 음악치료 같은 걸 할까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어요. 그러다 취미로라도 악기를 해야겠어서 아버지께 아무 악기나 좋으니 사달라고 졸랐죠. 그랬더니 아버지는 어지간한 활 값보다도 싼 악기를 사오셨어요. 그게 이 악기죠(서울국제음악콩쿠르에서도 이 악기를 사용했다-편집자 주). 처음에 이 악기에서는 꽥꽥 거리는 소리가 났는데, 당시에는 악기 소리가 나쁜 줄 몰랐어요. 저도 3년을 쉬어서 아무 연주도 안 됐었으니까요. 그래서 이 악기에 제 손이 길들여지고, 제 손에 이 악기가 길들여지게 됐어요. 다른 사람들은 이 악기로 소리를 잘 못 내요. 저만이 낼 수 있죠.
독일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6년 전 한국행을 결심한 까닭은 무엇인가요?
저를 잘 알고, 제 실력을 다시 잡아줄 분에게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 김남윤 선생님이 떠올랐죠. 선생님께서 초등학교 4학년 때 6개월 정도 봐주신 적이 있어요. 제가 손가락이 부러졌을 때, 악기를 안 하면 안되는 앤데 어쩜 운이 그렇게 안 따라주냐며 전화까지 주신 분이세요.
자, 이제 콩쿠르 얘기 좀 해볼까요? 제5회 서울국제음악콩쿠르에서 우승한 것 축하합니다.
어릴 때에 많이들 콩쿠르에 나가는데, 저는 계속 연주만 해온 케이스예요. 2005년 퀸엘리자베스 콩쿠르가 처음 나간 콩쿠르였죠. 너무 웃기죠. 남들은 다 마지막에 밟는 자리인데 가장 먼저 나갔으니까요. 제가 그 콩쿠르에 나가는 것이 아버지의 소원이었거든요. 우승할 확률은 없더라도 한 달의 콩쿠르 기간 동안 가슴에 와 닿는 큰 경험을 하게 될 것이란게 아버지의 뜻이었죠. 운 좋게 2차까지 됐는데 떨어졌고, 이후 욕심을 낮췄어요. 늘 떨어지거나 3등 하거나 했는데, 처음으로 1등을 했더니 일주일 동안 실감이 나지 않더라고요.
본선에서 베토벤 협주곡 D장조를 연주했잖아요. 가장 자신 있는 곡이었나요?
콩쿠르가 아니면 제가 언제 또 곡을 마음대로 골라서 협연하겠나 싶었어요. 한 곡을 '18번'으로 만들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도 콩쿠르를 나가게 될 텐데 매번 같은 곡을 하면 질릴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본선 무대에 가니 막막했어요. 그런데 다행히 리허설 때부터 잘해야겠다는 부담보다 무대에 서는 기쁨이 더 커졌어요. 무대에 서는 걸 정말 좋아하거든요. 연주를 하다 보면 가끔 저 자신도 모르던 저의 모습을 발견해 소름이 돋는 순간이 있어요. 말도 안되는 핑거링이나 보잉이 될 때가 그렇죠.
스승인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이 심사위원으로 있어서 부담스럽진 않았나요? 콩쿠르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이었는지요.
부담보다는... 선생님께 실망을 안겨드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버뜩 들 때가 있었어요. 제가 다른 제자들에 비해 콩쿠르 성적이 워낙 안 좋았잖아요. 선생님께서는 제게 재능이 있다고 하시며, 노력 앞에서는 재능도 소용없으니 항상 노력하라고 하셨어요.
콩쿠르에서 떨어지면 주위 사람들이 '주미는 실력에 비해 콩쿠르 운이 너무 없다'라는 말을 해주곤 했어요. 예전에는 그 말이 위로가 됐는데, 언젠가부터 그 말이 싫증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결심했죠. 운이 나를 따르지 않는다면, 내가 운을 뛰어넘는다! 그렇게 준비한 이번 콩쿠르는 저 자신과의 싸움이었어요. 7시간 연습하기로 한 날에 6시간 반만 연습하면 제 스스로가 실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어요. 성격이 급한 사람도 아니고, 최고가 되겠다는 마음에 음악을 하는 사람도 아닌데, 저답지 않게 생활 패턴까지 바꾸며 콩쿠르를 준비했어요. 콩쿠르를 준비하면서 정말 많은 걸 배웠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요. 우승이 제게 준 건 '드디어 해냈어!' 가 아니라 '할 수 있어!'인 것 같아요. 자신감을 많이 얻었죠.
콩쿠르에 나가며 겪는 남다른 고충이 있나요?
처음 두 번의 콩쿠르는 아버지께서 비용을 대주셨는데, 그게 다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았죠. 그래서 이후 콩쿠르부터는 제가 아르바이트로 벌어서 콩쿠르 비용을 댔어요. 외국 콩쿠르에 갈 때 비행기 티켓과 숙박료에 악기 대여까지 하려면 얼추 1천만 원이 들어요. 저 스스로의 능력으로 1천만 원 벌려면 녹음을 비롯해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죠. 콩쿠르 치르러 가기 전날까지 아르바이트를 한 날도 있어요. 아, 전 레슨은 안해요. 연주를 얼마나 한다고 누굴 가르치고 있나 싶기도 하고,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것도 힘들어서요. 이번에 콩쿠르는 아르바이트에 대한 부담이 없어서 좋은 결과가 있었는지도 몰라요. 외국에 콩쿠르 나갈 때에는 연습 시간을 줄여가며 돈을 벌었는데, 이번에는 오로지 연습에만 집중했으니까요. 하지만 콩쿠르가 학교 바로 앞에서 치러지니 집중이 쉽지 않고 부담도 커지더라고요.
20대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됐죠. 앞으로의 20대를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하고 싶은게 너무너무 많아요! 작사, 작곡, 작문, 다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사실 노래도 꽤 하고, 춤추는 것도 굉장히 좋아해요. 가수 제안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바이올린만 하기에도 너무 바빠요. 일단 바이올린에만 충실하고 싶어요. 그러면서 여기저기 기회를 엿볼 거예요. 작곡도 하고, 체임버도 만들며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닌 '음악인'이 되고 싶어요.
끝으로 롤 모델이 있으면 이야기해주세요.
음악가는 아닌데... 이를 테면 간디처럼, 무엇인가 포기해야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금전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보다는 음악의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연주하고 싶어요. 가난하게 태어난 게 죄는 아니잖아요. 그들에게 음악이 주는 행복을 알려주고 싶어요. 음악가 중에서는 안네 소피 무터가 롤 모델이에요. 귀가 너무 좋고, 놓치는 음이 없으며, 항상 프로다운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죠. 어디서 들리든 무터의 연주는 딱 알겠어요. 그런 연주자가 되고 싶어요.
글. 김정은 / 사진. 강태욱
월간 객석. 2009. 6월호
SPOTLIGHT(Page 88~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