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63세의 여유, 19세의 패기, 그 사이에 따뜻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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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_concours2
작성일
2009-11-28 15:06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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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무대 선 피아니스트 백건우, 김태형·김준희·김선욱

10일 저녁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 위 피아니스트 김준희(19)군이 두 손을 나팔처럼 모아 큰 소리로 외쳤다. “백건우 선생님이 오늘 생신이세요!” 피아노 앞에는 이미 김선욱(21)씨가 앉아 있었다. 김선욱이 호쾌한 분산 화음으로 치기 시작한 음악은 생일 축하 노래. 청중과 연주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랑하는 백건우 생일 축하합니다”라고 합창했다. 피아니스트 백건우(63)씨는 후배 연주자들의 깜짝 축하에 놀라 무대 위에서 한동안 당황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피아니스트 김태형(24)의 팔에 가벼운 ‘펀치’를 날리며 짓궂은 ‘서프라이즈 파티’에 대한 답례를 표했다.



피아노는 혼자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백건우씨가 후배 연주자 세 명과 함께 무대에 선 10일 공연은 그런 만큼 쉽게 만날 수 없는 음악회였다. 왼쪽부터 김선욱, 김준희, 김태형, 백건우. [크레디아 제공]

이날 열린 ‘백건우와 김태형·김준희·김선욱’ 공연에서 있었던 일이다. 무대에는 피아노 네 대가 한꺼번에 놓였다.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며 백씨가 3년 전부터 기획한 공연이다. 만 스무살이 채 안 된 김준희부터, 한국의 ‘젊은 피아노 파워’를 세계에 보여준 김선욱·김태형이 한자리에 모였다.

◆사연 있는 음악회=우정과 존경이 넘쳤던 깜짝 앙코르에서도 볼 수 있듯, 이날 공연은 ‘이야기’가 있는 음악회 모델을 제시했다. 백건우씨는 연주에 앞서 “나도 외국에서 외롭게 공부할 때 한동일(68) 선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제는 돌려줘야 할 때”라고 말했다. “내가 거주하는 파리에서 국제 콩쿠르가 열릴 때면 객석에 앉아 한국 젊은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었다”는 백씨 사연 덕에 이날 공연은 단순한 음악 이상의 것을 관객에게 남겼다.

바그너 ‘탄호이저’ 서곡으로 시작된 이날 공연에서는 이러한 따스함을 머금은 네 피아니스트의 눈빛 교환이 이어졌다. 연주자들은 멜로디와 리듬을 주고받으며 복잡하고 웅장한 구성을 소화해 나갔다. 프랑스 작곡가 미요의 ‘파리 모음곡’, 체르니의 콘체르탄테 C 장조 등 피아노 네 대가 한꺼번에 소리를 내는 작품이 잇따라 연주됐다.

◆흔치 않은 음악회=이처럼 피아니스트 네 명이 한 번에 무대에 서는 일은 드물다. 우선, 네 대의 피아노를 위해 작곡된 작품이 적다. 백건우씨는 이날 연주할 곡을 정하고 악보를 찾는 데에만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후배들에게 일일이 악보를 보내고 음악에 대한 코멘트를 남겼다. 연주를 앞두고는 하루 예닐곱 시간의 맹연습을 함께하며 이 생소한 공연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 성과는 이날 연주의 ‘서라운드’ 음향으로 나타났다. 한 대의 피아노로는 낼 수 없는 360도 화음이었다. 무대 위 네 대의 피아노는 조각 케이크를 모으듯, 가운데를 보고 둥그렇게 놓였다. 때문에 모든 객석에서 피아노 건반을 볼 수 있었다. 피아니스트의 손이 보이는 곳이 ‘명당’이라는, 기존 개념이 사라지고 음향은 사방으로 공평하게 퍼져나갔다.

아쉽게도 연주자들은 서로의 소리를 듣기가 힘들었다. 특히 오케스트라 연주곡인 라벨의 ‘볼레로’를 피아노 네 대로 편곡한 작품에서 연주자들은 강한 집중력이 필요했다. 똑같은 리듬을 15분 동안 수십 번씩 나눠가며 반복할 때 백건우의 여유로움과 김선욱의 대담함, 김태형의 아름다운 음색과 김준희의 정확한 타건이 돌아가며 들렸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중앙일보 2009. 5.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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