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건반 위에 펼쳐진 '큰별'과 '샛별'의 흥겨운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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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_concours2
작성일
2009-11-28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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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우와 젊은 피아니스트들

4명의 연주자, 8개의 손, 40개의 손가락, 352개의 건반…. 10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피아노의, 피아노에 의한, 피아노를 위한 음악 잔치가 열렸다.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최근 국제 콩쿠르에서 잇달아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김태형·김선욱·김준희 등 젊은 피아니스트들이 한 무대에서 '피아노 4중주'를 펼친 것이다. 서로의 표정만으로 호흡을 맞추기 위해 대형 그랜드 피아노 4대는 모두 뚜껑을 걷어냈고, 곡마다 서로 자리와 역할을 바꿔가며 피아노 협연을 벌였다.

첫 곡인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 서곡을 피아노 4대로 연주하면서, 김태형과 김준희가 서주(序奏)를 열어가면 백건우가 바그너 특유의 물결을 그려내고 김선욱은 중저음(中低音)으로 우렁찬 금관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기존의 오케스트라 대신 피아노로만 연주하자, 여린 대목은 바흐(Bach)의 소박한 건반 음악을 듣는 듯한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다리우스 미요의 〈4대의 피아노를 위한 파리 모음곡〉 가운데 4번째 〈증기유람선〉에서 세 연주자의 반주 위에 얹힌 김준희의 독주는 청명하기 그지없었다.

작곡가 체르니는 피아노에 입문하는 모든 연주자를 골치 아프게 하는 원망의 대상이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4대의 피아노를 위한 콘체르탄테〉를 통해 김태형에서 김선욱으로 독주(獨奏)가 엇갈리고 파가니니와 리스트의 선율로 유명한 〈라 캄파넬라〉 등 각종 인용과 패러디로 유머 감각을 과시했다. 고루한 '피아노 연습 교재'의 작곡가라는 이미지도 4명의 유쾌한 건반 덕분에 더불어 사라졌다.


▲ 연주 내내 그랜드 피아노 4대로 무대를 가득 채웠던 피아니스트들은 앙코르 때는 피아노 1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네 명의 손은 건반 위를 어지럽게 교차했고, 악보를 넘기기 위해서는 자리에서 일어서야 했다. 이들의‘고생’에 객석의 웃음소리도 더불어 커졌다./크레디아 제공

'관현악의 귀재(鬼才)'인 라벨의 작품을 피아노 4대를 위해 편곡한 〈볼레로〉는 화려한 악기들의 고유한 색채가 사라져버린 대신, 음량(音量)과 셈 여림으로만 표현해야 했다. 이 때문에 총(總)천연 컬러 대신 흑백으로 화면을 보는 듯한 답답함이 없지 않았다.

실제 피아노에는 바이올린의 화려함이나 오보에의 끈기, 바순의 위트 같은 고유한 색채는 존재하지 않는다. 때때로 무미건조하고 중성적이라는 비판도 받지만, 대신 피아노의 모든 소리는 음(音)과 음 사이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피아노의 약점은 곧바로 장점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선배' 백건우가 '후배' 연주자들에게 건네주고 싶은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앙코르에서 들려준 라비야크의 〈갈롭 행진곡〉에서는 피아니스트 4명이 피아노 1대 앞에 비좁게 나란히 앉아 8개의 손이 서로 뒤엉키고 얽히면서 건반 위에서 함께 춤추는, 흥겨운 퍼포먼스(performance)를 펼쳤다. 이날은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63번째 생일이었다. 김준희가 "생일 축하 드립니다"라고 외치고, 김선욱이 반주를 연주하자, 관객 2500여명이 축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따뜻한 정경이 펼쳐졌다.

김성현 기자 danpa@chosun.com

조선일보 2009. 5.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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