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09 샛별 "피아니스트 김태형"
작성자
admin_concours2
작성일
2009-11-28 14:48
조회
343
2009 샛별 피아니스트 김태형
배 고팠다, 슬펐다 건반 있어 이겨냈다
김태형씨는 “내 음악에 고집과 뜨거움을 불어넣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특유의 차분하고 선한 음악을 업그레이드하고 싶다는 뜻으로 들렸다. [안성식 기자]
피아니스트 김태형(24)씨는 2005년 3월을 “후회로 힘들던 시기”라고 기억했다. 1년 동안 후두암을 앓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봄이었다. “그때 일본 하마마쓰 피아노 아카데미에 있었어요. 가면 안됐나봐요. 아버지가 많이 안 좋으셨는데….” 외국 출신 명교수들에게 공개레슨을 받는 아카데미 중간에 그는 부음을 듣고 귀국했다. 만 스무살이었다.
장례를 끝내자마자 김태형은 일본으로 돌아갔다. “선생님(강충모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이 머뭇거리지 말고 아카데미를 마치고 오라고 했어요.” 이 아카데미는 참가 학생들의 콩쿠르로 끝난다. 그는 슬픔으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콩쿠르에 참가했다. 성적은 썩 좋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고통스럽던 마음이, 음악에 집중하니 해소가 되더라고요.” 그가 평생 음악을 붙들고 살기를 결심했던 때다.
김태형은 지난해 롱티보 국제 콩쿠르 4위에 입상하면서 이름이 알려졌다. 이전에는 그보다 규모가 작은 포르투·모로코 콩쿠르 등에서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에게 콩쿠르는 다음 출전의 비행기삯과 참가비를 마련하는 기회다. 지난해 3월 스위스의 인터라켄 클래식스 콩쿠르에서 받은 우승 상금은 고스란히 유학 자금이 됐다. 그는 현재 독일 뮌헨에서 공부 중이다. “상금을 받으면 용돈으로 쓰는 친구들을 보며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어요. 나도 평생 피아노 잘치는 것 하나만 생각하며 살 수는 없나 하고요.”
결핍과 슬픔을 딛고 선 그의 음악은 진지한 해석과 고민 담긴 표현이 특징이다. 5월 '백건우와 영 피아니스트' 무대에 함께 설 주자 중 한명으로 김태형을 선정한 피아니스트 백건우씨는 “음악의 전체를 볼 줄 안다”는 칭찬을 했다. 젊고 실력있는 피아니스트가 빠지기 쉬운 과시적 연주의 함정을 피해나가고 있다는 뜻이다.
어려서부터 콩쿠르와 입시를 대비한 '연주 기계'로 길러지지 않은 것이 김태형의 저력이다. “동네 학원에서 배우기 시작했어요.”
예술 중학교 과정인 예원학교 입시에서 낙방한 경험도 있다. 그는 “무대 경험이 워낙 없었기 때문에 손이 꽁꽁 언 걸 모르고 그냥 쳤어요”라며 웃는다. 입학을 포기한 합격자가 한명 있어 보결로 입학했던 그는 눈부신 성장을 하며 또래 중 가장 주목받는 피아니스트로 성장했다.
제 손으로 레슨비·생활비를 벌기 위해 했던 어린 시절의 노력도 지금의 김태형을 키웠다. 그는 반주·레슨 등의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다.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에서 협연자를 뽑기 위해 여는 오디션마다 단골 반주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올해 오디션에는 제가 유학 가 있어서 얼굴이 안보이기에 허전했다는 사람도 있어요.” 이처럼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피아노 독주곡 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음악 작품을 꿰뚫게됐다. “단지 피아노를 잘 치는 '기술자'가 아니라 음악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허황돼 보이지 않는 이유다.
김태형은 이달 7일 예술의전당에서 권혁주(24·바이올린), 김현정(17·피아노)과 함께 '칸타빌레 스페셜 리사이틀'에 출연한다.
김호정 기자 , 사진=안성식 기자
중앙일보 2009. 2. 6(금)
중앙일보에서 보기
배 고팠다, 슬펐다 건반 있어 이겨냈다
김태형씨는 “내 음악에 고집과 뜨거움을 불어넣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특유의 차분하고 선한 음악을 업그레이드하고 싶다는 뜻으로 들렸다. [안성식 기자]
피아니스트 김태형(24)씨는 2005년 3월을 “후회로 힘들던 시기”라고 기억했다. 1년 동안 후두암을 앓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봄이었다. “그때 일본 하마마쓰 피아노 아카데미에 있었어요. 가면 안됐나봐요. 아버지가 많이 안 좋으셨는데….” 외국 출신 명교수들에게 공개레슨을 받는 아카데미 중간에 그는 부음을 듣고 귀국했다. 만 스무살이었다.
장례를 끝내자마자 김태형은 일본으로 돌아갔다. “선생님(강충모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이 머뭇거리지 말고 아카데미를 마치고 오라고 했어요.” 이 아카데미는 참가 학생들의 콩쿠르로 끝난다. 그는 슬픔으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콩쿠르에 참가했다. 성적은 썩 좋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고통스럽던 마음이, 음악에 집중하니 해소가 되더라고요.” 그가 평생 음악을 붙들고 살기를 결심했던 때다.
김태형은 지난해 롱티보 국제 콩쿠르 4위에 입상하면서 이름이 알려졌다. 이전에는 그보다 규모가 작은 포르투·모로코 콩쿠르 등에서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에게 콩쿠르는 다음 출전의 비행기삯과 참가비를 마련하는 기회다. 지난해 3월 스위스의 인터라켄 클래식스 콩쿠르에서 받은 우승 상금은 고스란히 유학 자금이 됐다. 그는 현재 독일 뮌헨에서 공부 중이다. “상금을 받으면 용돈으로 쓰는 친구들을 보며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어요. 나도 평생 피아노 잘치는 것 하나만 생각하며 살 수는 없나 하고요.”
결핍과 슬픔을 딛고 선 그의 음악은 진지한 해석과 고민 담긴 표현이 특징이다. 5월 '백건우와 영 피아니스트' 무대에 함께 설 주자 중 한명으로 김태형을 선정한 피아니스트 백건우씨는 “음악의 전체를 볼 줄 안다”는 칭찬을 했다. 젊고 실력있는 피아니스트가 빠지기 쉬운 과시적 연주의 함정을 피해나가고 있다는 뜻이다.
어려서부터 콩쿠르와 입시를 대비한 '연주 기계'로 길러지지 않은 것이 김태형의 저력이다. “동네 학원에서 배우기 시작했어요.”
예술 중학교 과정인 예원학교 입시에서 낙방한 경험도 있다. 그는 “무대 경험이 워낙 없었기 때문에 손이 꽁꽁 언 걸 모르고 그냥 쳤어요”라며 웃는다. 입학을 포기한 합격자가 한명 있어 보결로 입학했던 그는 눈부신 성장을 하며 또래 중 가장 주목받는 피아니스트로 성장했다.
제 손으로 레슨비·생활비를 벌기 위해 했던 어린 시절의 노력도 지금의 김태형을 키웠다. 그는 반주·레슨 등의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다.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에서 협연자를 뽑기 위해 여는 오디션마다 단골 반주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올해 오디션에는 제가 유학 가 있어서 얼굴이 안보이기에 허전했다는 사람도 있어요.” 이처럼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피아노 독주곡 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음악 작품을 꿰뚫게됐다. “단지 피아노를 잘 치는 '기술자'가 아니라 음악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허황돼 보이지 않는 이유다.
김태형은 이달 7일 예술의전당에서 권혁주(24·바이올린), 김현정(17·피아노)과 함께 '칸타빌레 스페셜 리사이틀'에 출연한다.
김호정 기자 , 사진=안성식 기자
중앙일보 2009. 2. 6(금)
중앙일보에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