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연습벌레’만으론 파가니니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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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_concours2
작성일
2013-11-28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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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에 다니는 김동우 씨(20·실기과 1학년 발레 전공). 매일 오전 6시 반이면 경기 김포의 집을 나서 오전 8시부터 서울 서초동 학교 연습실에서 연습에 돌입한다. 오전 9시 발레, 오후 2시 파드되(2인무) 수업 등 교과 이외에도 외부 공연 리허설과 개인 연습, 콩쿠르 준비로 오후 9, 10시까지 연습에 몰두한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쪽잠으로 부족한 잠을 보충한다. “아침식사를 못하고 집을 나서면 하루의 첫 식사를 집에 도착해 밤 12시를 넘겨 먹을 때 도 많아요.” 그는 지난해 초 남아프리카공화국 콩쿠르 발레 주니어부문 금상을 탔다. 올해도 다른 콩쿠르에 도전할 생각이다.

한예종 음악원의 이지윤 씨(21·전문사 1학년 바이올린 전공)도 오전 6시 일어나자마자 활부터 잡는다. 밥 먹고 수업을 듣는 시간을 빼면 하루 종일 악기를 잡고 산다. 2011년 제11회 사라사테 국제바이올린콩쿠르 2위, 지난해 서울국제음악콩쿠르 4위를 한 그는 “지기 싫은 마음 때문에 콩쿠르 준비를 열심히 하는데 이 과정에서 실력이 부쩍 는다”고 말했다.

외국의 같은 전공 학생들은 어떨까. 미국 캘리포니아 예술학교 무용원 창작과 2학년인 필립 러시 씨(21)를 e메일로 인터뷰했다. 그는 오전 9시에 일어나 10시쯤 학교에 도착한다. 늦어도 오후 5시면 수업이 다 끝난다. 수업 후 공연 리허설에 참가하는 경우가 많지만 밤늦게까지 이어지진 않는다. 프랑스의 공립 예술학교인 파리 콘서바토리(CNSNDT)에선 오후 8시면 학교 문을 닫는다. 이 학교 무용원 졸업반인 서창현 씨(21)는 “오후 8시 이후엔 연습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주말에도 학생들은 대부분 집에서 가족과 보낸다. 학교에선 나이가 어리다고 콩쿠르 참가도 못하게 한다”고 전했다.

 

한국에서는 김 씨와 이 씨가 극히 예외적인 연습벌레는 아니다. 한예종 학생 대부분이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최근 국제 콩쿠르 입상자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건 이처럼 한 우물만 파는 한국만의 교육시스템과 콩쿠르 참가를 위한 집중 학습, 개인의 교육열이 합쳐진 결과다.

국제 콩쿠르 한국인 입상자의 90%가량을 차지하는 한예종 학생들을 대상으로 입상자 수를 조사한 결과 클래식부문에선 1999년 처음으로 2명의 입상자를 낸 이후 점차 증가해 2010년에는 41명으로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무용도 2008년(16명)부터 국제대회의 입상자 수가 두 자릿수로 늘었으며 지난해에는 국제 콩쿠르 10곳에서 45명이 입상했다.


전문가들은 연주자와 무용수 분야에서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섰다는 데 이견이 없다. 김남윤 한예종 음악원 교수는 “2011년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2012년 퀸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 등 권위 있는 콩쿠르에서 입상자를 배출했다는 건 대단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2004년 한예종 졸업 후 워싱턴 발레단에서 활동한 한예종 무용원의 조주현 교수는 “내가 졸업할 당시만 해도 해외 무용단에서 입단 제의를 받는 경우가 거의 없었지만 지금 학생들은 입단 제의도 많이 받는다. 10년 전에 비해 세계무대에서 한국 무용수들의 위상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하지만 ‘연주자와 무용수의 기량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사실이 ‘클래식 음악과 무용에서 한국이 세계 최고’임을 뜻하진 않는다. 테크니션으로 인정받는 것과 장기적으로 세계적인 아티스트를 배출하는 것은 별개이다. 종합 예술가로 키우려면 지금의 실기 일변도, 경쟁 위주의 교육이 달라져야 한다는 지적이 그래서 나온다.

우선 교과과정이 전공 관련 수업에 편중돼 있다. 한국 학생들은 인문학적 소양을 키우고 다양한 테크닉 속에서 자기 것을 만들어갈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지적이다. 한예종 음악원의 경우 전공실기와 이론 과목 말고 다른 분야에 대한 수업은 거의 없다. 반면 미국 커티스 음악원은 필수 교과에 ‘미술사’ ‘언어와 문학’ 등 음악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인문학 수업이 포함돼 있다. 이 학교 바이올린 전공자인 주리판 씨(22)는 “학교에선 심리학적 지식도 갖추고 미술사에 대해 의견도 낼 수 있는 종합적인 예술가가 되라고 요구한다”고 전했다.

박제성 음악평론가는 “한예종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고급 예술학교로 발전하려면 음악도 중요하지만 역사, 철학, 미술 수업을 늘려야 한다”라고 말했다.

콩쿠르 참가도 과열 분위기로 흐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나친 경쟁은 예술가로 성장하기 위한 자유로운 사고를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한예종을 졸업한 뒤 독일 뮌헨 국립음대에서 피아노를 공부하고 있는 손정범 씨(22)는 “한국이 경쟁적으로 콩쿠르에 나가는 반면 독일은 콩쿠르 참가보단 자유롭게 자기 세계를 쌓아가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김대진 한예종 음악원 교수는 “해외 국제 콩쿠르 심사를 가면 한국 학생들은 잘해야겠다는 부담감에 긴장해서 연주가 딱딱하다. 음악을 즐기고 악기와 교감할 여유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콩쿠르 입상이 해외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좋은 수단이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장인주 무용평론가는 “무용의 경우 테크닉보다는 안무가 점차 중요해지는 추세”라고 말했다. 제임스 전 서울발레시어터 예술감독도 “세계적인 무용수, 안무가 중에는 콩쿠르 입상 경력이 없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창의력인데 지금의 한국 예술교육은 그 부분을 키우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전주영·김성규 기자 aimhigh@donga.com

 

동아일보 2013년 1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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