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수준높은 참가자, 매끄러운 조직력

작성자
admin_concours2
작성일
2008-11-28 14:04
조회
39


"늘 느끼는 바이지만, 쇼팽이라는 작곡가는 도무지 '콩쿠르'와는 어울리지 않는 작곡가입니다. 쇼팽 콩쿠르에서 우리가 찾는 것은 보다 참된 탤런트인데, 콩쿠르에서 상을 받으려면 재능보다는 인내심과 정확함이 더 필요하죠. 그런데 진정한 예술가는 이런 요소를 갖추고 있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세르게이 도렌스키(스타니슬라프 부닌의 스승)
"제 자신도 여러 콩쿠르에서 입상했습니다만, 저의 연주를 모든 청중들이 다 사랑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뛰어난 연주자의 기량과 재능은 끝내 청중들의 박수갈채를 이끌어낸다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때의 박수는 콩쿠르의 챔피언에게 주는 박수와는 다르겠죠." - 엘리소 비르살라제(보리스 베레초프스키의 스승)
"제가 반 클라이번 콩쿠르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나갈 당시 저의 스승이었던 야콥 자크 선생님의 노력은 정말 눈물겨웠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목표를 놓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죠. 다행히 결과는 성공적이었지만, 지금껏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성공적인 연주를 위해 달려가던 과정이었습니다. 그 과정은 결과보다 더 아름다웠죠." - 니콜라이 페트로프(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심사위원장)

이상은 이른바 '콩쿠르 전문가'라고 할 만한 권위자들이 필자에게 직접 들려준 내용이다. 진정한 재능과 더 높은 예술의 경지를 발견하기 위함이라는 콩쿠르의 대원칙은 어디서나 같지만, 이들의 이야기에서 어딘지 모르게 콩쿠르에 대한 냉소가 흘러나오고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이른바 콩쿠르의 포화상태가 닥친 20세기 말의 증언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해 '콩쿠르 무용론'이 대두된 것은 오히려 음악 비즈니스 분야에서다. 아무리 귀한 재주와 능력을 갖춘 연주자라도 매년 배출되는 1위 입상자들마다 화제를 끌 수는 없는 일이며, 그런 관점에서 보아 무수히 많은 콩쿠르의 존재가치가 어디에 있느냐는 회의론이다. 그 와중에, 좀더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자 '표준화'된 연주가 콩쿠르의 큰 유행으로 나타났던 것도 사실이었다. 연주와 시스템 양쪽에서 새로운 경향의 출현이 절실했다고 하겠다.

12년 만의 귀환, 곡목 선택에 최대한 자유 부여
다행히 새로운 세기를 맞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콩쿠르에도 많이 전달되었다. 대한민국에서 10년 만에 부활한 서울국제음악콩쿠르는 그런 면에서 지난 세기의 모습을 완전히 덜어낸 새로운 대회라고 생각된다. 올해 치러진 피아노 부문은 같은 부문끼리 셈하자면 무려 열두 해 만의 반가운 귀환이다. 불의의 외환위기가 대회의 지속을 막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지난 12년의 세월은 우리나라 피아노계의 국제적 위상이 참으로 많은 변화와 성장을 보인 시간이었다. 이른바 '꿈'의 경연 대회들에서 한국인 입상자의 이름을 찾기가 어렵지 않게 되었고, 서양의 텃세를 누르고 대한민국 연주자가 1위를 차지하는 뿌듯한 일들도 생겼다. 국내에서만 배운 학생들의 연주에 본고장의 대가들이 탄복하며, 한국의 피아니스트와 교육자들이 세계로 나가 심사위원으로 자신의 음악적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국제 콩쿠르도 많아졌다. 이번 대회에서 권위 있는 심사진 앞에 모인 18개국 40명의 피아니스트들이 들려준 다채로운 연주는 급성장한 '피아노 강국'의 현주소를 알려주는 생생한 증거였다.
올해 콩쿠르 내용 중 가장 특별한 점은 연주자들이 선택하는 프로그램에 최대한의 자유를 부여해주었다는 것이다. 모두 세 차례인 피아노 독주 무대에서 참가자들은 고전 시대의 소나타와 한국 작곡가의 작품을 연주해야 한다는 사항만을 지시받은 채 그 외의 모든 프로그램을 자유롭게 고를 수 있었다. 그 결과 연주자들은 각자의 개성과 색채를 띤 음악관을 폭넓게 피력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되었으며, 대회 무대에서 지금껏 찾아보기 힘들었던 신선하고 다양한 해석을 들려주었다. 열띤 경쟁 속에 심사위원들의 고충도 만만치 않았을 것인데, 단순히 연령대를 고려한 성숙도나 텍스트의 정확한 전달을 위한 방법과 기교를 평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작곡가와 작품, 그리고 연주자라는 삼각 구도의 논리적인 균형과 총체적인 완성도를 고려한 심사가 이루어졌다고 보여진다.
1, 2차 예선과 준결선 무대를 거쳐 협주곡을 연주하는 결선에 모두 여섯 명의 연주자가 최후의 대결을 펼쳤다. 우승을 차지한 마리야 킴은 우크라이나 태생의 고려인 3세로, 참가자 중 비교적 높은 연령(27세)에 걸맞게 안정감 있는 테크닉과 템포감각, 정돈된 해석능력이 돋보였다. 준결선에서 연주한 라흐마니노프의 소나타 2번은 가볍게 번쩍이지 않고 가라앉은 세련된 음색과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러시아적인 스케일로 가장 많은 점수를 얻었다. 협연 무대에서도 역시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2번을 선택했는데, 묵직한 느낌의 터치와 선이 굵은 음악적 진행 등에서 '큰 그릇'의 연주자라는 인상을 청중과 심사위원들에게 각인시켜주었다. 결선에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연주하여 2위를 한 알렉세이 골라치는 소년 같은 외모의 전형적인 천재형 피아니스트라고 하겠다. 이색적으로 그는 예선부터 기교적인 화려함보다는 음악성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들을 선택했는데, 바르토크의 모음곡 '문밖에서', 슈만의 환상 소품집 등을 스무 살 음악가의 해석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농염한 감성을 과도하지 않게 소화했다. 결선에서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 1번을 연주하여 3위를 차지한 김태형은 깔끔한 테크닉과 고른 프레이징, 지적인 조절 능력으로 청중들에게 높은 호응을 얻었으며, 예선을 거쳐오면서 다양한 프로그램 안에서 자신의 일관성 있는 스타일을 청중들에게 어필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고 보여진다. 그 외에도 임효선은 아기자기한 악상과 설득력 있는 감성표현이 일품이었으며, 그와 함께 공동 4위를 차지한 에릭 주버(미국)는 시종 유창한 기교와 파워풀한 터치로 인기를 얻었다. 독특한 뉘앙스의 쇼팽 협주곡을 결선에서 연주한 마리아나 프레발스카이아(스페인)는 특히 2차 예선에서 연주한 프로코피예프의 소나타 8번이 인상 깊었는데, 작은 체구에도 작품을 완전히 장악하는 탁월한 솜씨를 선보이며 성숙한 대가의 풍모를 느끼게 해주었다.

긴 안목 갖고 21세기 축제의 경연으로 발전해야
서울국제음악콩쿠르는 참가자들의 높은 수준과 함께 음악 외적으로도 매끄러운 진행과 짜임새 있는 조직력으로 호평을 받았다. 앞서 언급한 바,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스타의 탄생이나 센세이셔널한 뉴스로 대변되던 20세기의 콩쿠르와는 많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21세기의 경연대회이다. 우리 모두가 서울국제음악콩쿠르에 바라는 것 역시 멀리 바라보는 '혜안'이 될 것이다. 반짝이는 흥밋거리나 화려함을 지닌 인물을 찾아내기보다는 좀더 긴 안목으로 참되고 소중한 예술혼을 발굴하고 격려해주며 그들의 음악이 만개하기까지 긴 호흡을 갖고 든든한 모습으로 응원해주는, 새롭고 멋진 축제의 경연으로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글_김주영(피아니스트) / 사진_서울국제음악콩쿠르

월간 객석 auditorium. 2008. 6월호
After the Competition (Page 88~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