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문화칼럼/백주영 “서울 국제음악콩쿠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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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_concours2
작성일
2007-11-28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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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국제콩쿠르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던 한국 최초의 ‘동아국제음악콩쿠르’가 외환위기로 개최 2년 만에 막을 내리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당시 1위 상금 5만 달러 등 총상금 12만 달러의 획기적 기획으로 전 세계 유망 음악도들을 서울로 모여들게 한 우리의 국제콩쿠르. 1996년 제1회 피아노 부문, 1997년 제2회 바이올린 부문, 그 다음 해에는 성악 부문을 개최하려다 접힌 꿈이 되어 음악계 모두가 안타까워했던 그 콩쿠르가 드디어 ‘서울 국제음악콩쿠르’로 10년 만에 재기했다.

내게는 이름만 들어도 그 긴장감과 흥분이 바로 어제 일처럼 기억이 생생한 동아국제음악콩쿠르가 벌써 10년 전의 일이라니, 만감이 교차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콩쿠르 참가에 대한 설렘, 1위로 우승했을 때의 감격, 그리고 콩쿠르 종료 후 불과 2주도 안 돼 발표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시대의 도래로 콩쿠르 일시 중지 소식을 들었을 때의 허탈감, 언제 콩쿠르가 부활할까 하는 생각이 늘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던 지난 시간들이었다.

‘세계적인 음악가를 다수 배출한 대한민국도 이제 중요한 국제콩쿠르를 가졌구나’ 하는 자부심으로, 그러나 개최 국민으로서 더 많은 관심과 기대를 받으며 참가했기에 부담이 컸던 콩쿠르였다. 그랬기에 지금도 1, 2차 예선과 준결선이 치러졌던 예술의 전당 리사이틀 홀에서 연주를 하거나 공연을 볼 때면 그때의 긴장감과 떨림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나는 1997년 동아국제음악콩쿠르 우승 후에도 1998년 인디애나폴리스 국제콩쿠르, 1999년 롱티보 국제콩쿠르, 2000년 YCA 국제오디션, 2001년 퀸 엘리자베스 국제콩쿠르 등 매년 큰 국제콩쿠르에 참가해 입상했다. 국제콩쿠르에 갈 때면 핀란드 이탈리아 미국 프랑스 벨기에 등 항상 낯선 외국으로 장시간 비행기를 타고 가 현지 음식, 시차, 언어, 콩쿠르 참가자들을 투숙시켜 주는 호스트 패밀리에 적응하는 것이 필수였다.

또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참가해 서양의 문화 선진국 출신들과 경쟁하는 외로움과 치열함 등이 바이올린 연주와 실력 자체보다도 크게 느껴진 나의 20대였기에, 집에서 어머니께서 해 준 밥을 먹고 가족의 기도와 정신적 지원을 듬뿍 받으며 참가한 동아국제콩쿠르에서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10년의 공백이 있었지만, 동아국제콩쿠르는 단 한 번의 세계무대 등장으로 음악계에 큰 자취를 남겼다. 1996년 피아노 부문 3위에 입상한 핀란드의 안티 시랄라는 2003년 리즈 콩쿠르에서 우승했으며, 1997년 나와 함께 공동 우승했던 루마니아의 바이올리니스트 리비우 프루나루는 이미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2위에 입상한 노련함으로 스위스 예후디 메뉴인 음악학교 교수를 지내고 현재 네덜란드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 악장으로 활동 중이다.

벨기에의 퀸 엘리자베스 국제콩쿠르는 한 달 동안 온 나라가 마치 문화 올림픽을 치르듯 인터넷은 물론 TV와 라디오 생중계 등으로 들썩들썩한다. 서울 국제음악콩쿠르도 앞으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음악팬들이 함께 나서 대표적 문화축제로 키워 나가야 할 것이다.

어제 서울 국제음악콩쿠르 성악 부문 1차 예선을 보며 지난 10년간 한국의 문화적 발전을 느꼈고 콩쿠르가 진정으로 부활했음을 실감했다. 긴장한 표정으로 애써 초조함을 감추며 결과를 기다리는 참가자들과 10년 전 나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예술의 전당 로비에서 서울 국제음악콩쿠르도 한국의 문화올림픽으로, ‘코리아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라고 불릴 날을 기대해 본다.

백주영 바이올리니스트·서울대 교수